#읽고생각하기 - 칭찬하지 않는 엄마 이야기
5분 만에 책 한 권 읽기?
EBS에서 방송 제작을 위해 실시한 실험현장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작은 도서관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 10명에게 선생님이 설명합니다.
“여러분들이 책을 한 권씩 읽을 때마다 선생님이 이 칭찬 스티커를 한 장씩 줄 거예요.”
아이들이 책장에서 책을 골라 읽기 시작합니다. 책장에는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의 책 150권외에 유치원생 수준의 책도 150권이 함께 꽂혀 있습니다. 후루룩 책장을 넘기고 선생님에게 달려가 칭찬 스티커를 받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모두 허겁지겁 책장을 넘기는 모습은 비슷했습니다. 10명의 아이들이 100분 동안 읽은 책은 무려 192권.(1권 읽는 데 걸린 시간 평균 5.2분) 그렇다면 192권의 책 중에서 자기 학년에 맞는 책은 과연 몇 권이나 선택됐을까요? 고작 22권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다른 두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가급적 빨리 읽을 수 있는 책, 그러니까 글은 적고 그림이 많은 책을 주로 고른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하나하나 내용을 살펴보면서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책에 푹 빠져 읽고 있는 두 아이는 형제였습니다. 많은 어머님들이 동기 유발을 위해 칭찬 스티커를 평소에 사용했는데 그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어머니 : 저는 집에서도 칭찬 스티커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거든요.
방송 관계자 : 왜 (칭찬 스티커를) 활용하지 않으셨나요?
어머니 : 칭찬을 할 일과 안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이는, 그냥 부모는 아이가 원해서 할 때까지 기다려줘야 되고 그렇기 때문에 칭찬 스티커를 써본 적은 없는데...
내가 만난 아이들
슬럼프에 빠진 아이들
종종 안타까운 아이들의 모습을 봅니다.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제가 잘 알거든요. 이전에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정말 열심히 해보고 싶은데 저도 모르게 멍 때리다가 시간만 보내고 그러다보면 저에게 더 짜증이 나고, 얼마 전까지도 안 그랬거든요. 이제 정말 열심히 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으니 미치겠어요.“
소위 말하는 슬럼프가 온 것입니다. 그런 학생들과 얘기를 하다보면 한 가지가 분명해집니다. 공부 자체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약하고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훨씬 강합니다. 공부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고, 공부하는 내용과는 상관없이 시험을 잘 보기 위해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온통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짜증내는 아이들
학생들이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한 문제를 붙잡고 있는 경우 가만히 학생들의 표정을 살펴보면 구분이 됩니다. 몸을 비비 꼬기 시작하고 얼굴 표정은 점점 어두워집니다. 연습장에 낙서를 하기도 잠시 딴 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을 지나도 다시 책상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왜 그러니?" 아이가 답합니다.
"문제를 푸는데 잘 안 풀리는 거예요. 어떻게 풀어보려고 좀 생각을 해봤는데 갑자기 짜증이 확 나네요."
시계만 보는 아이들
재수생이 모여 있는 자습실. 밤 10시까지 의무적으로 책상에 앉아 있어야 합니다. 9시가 조금 넘으면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도 있지만 상당수는 시계를 쳐다보기 시작합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두리번거리고 그냥 멍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는 학생들도 있습니다.
제가 물어봅니다. "왜 그러니?" 아이가 답합니다.
"저녁 9시만 넘으면 집에 빨리 가고 싶어져서 그런지 공부가 잘 안 돼요."
패닉상태의 아이들
"모의고사 성적을 반영하는 대학은 없습니다. 모의고사를 잘 봤다고 아니면 못 봤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제발 성적에 연연하지 말고 시험이 끝나면 어려웠거나 틀린 문제를 다시 풀어보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보완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재수학원 원장을 하면서 이런 얘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모의고사를 마치는 종이 울리면 학생들은 통제 불가능한 상태가 됩니다. 특히 모의고사 난이도가 올라간 경우에 학생들은 대부분 패닉상태에 빠져 그 후유증이 며칠을 가기도 합니다.
까먹기 위해 공부하는 아이들
모의고사가 끝나고 며칠 지나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에게 물어봅니다.
"얼마 전 모의고사 국어 비문학 지문과 영어 독해지문 내용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 사람?"
학생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당연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비슷한 질문을 참 많이 했습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공부를 잘 하는 학생부터 그렇지 않은 학생까지 질문을 했을 때 손을 들고 답한 학생의 비율은 전체의 1%를 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고등학생, 재수생 얘기를 했습니다. 아직 아이가 어린데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느낌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정말 큰일입니다. 모두 자신이 공부하는 내용에 대한 관심보다는 시험결과에만 몰두하는 아이들의 모습들입니다.
공부하는 내용에 대한 관심은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열심히 공부하는 경우에 몸과 마음의 저항이 생겨 나타나는 현상이 슬럼프입니다.(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 살고 있는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공부하는 내용에 대한 관심은 없는 상태에서 정해진 진도는 마쳐야 하는데 내용이 어렵거나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아 자꾸 진도가 늦어지면 당연히 짜증이 나겠지요.(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의 데이트에서 상대방이 어려운 질문을 던져 답하기 곤란한 경우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공부하는 내용에 대한 관심은 없는 상태에서 시간을 채워야 하는 경우에 공부에 집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겠지요.(어쩔 수 없이 나간 맞선 자리에서 예의를 차리기 위해 시간이 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공부하는 내용에 대한 관심은 없는 상태에서, 온통 관심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성적일 뿐인데 결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빨리 잊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겠지요. 당연히 기억나는 게 없겠고 다시 쳐다보기도 싶을 겁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아이들은 왜 공부하는 내용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걸까요? 일단 이렇게 되면 정말 곤란합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노력해도 잦은 슬럼프 때문에 고전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시간만 때우고 있다면, 공부하다가 조금만 어려워져도 짜증이 난다면, 시험을 통해 배우는 것은 없고 멘붕만 온다면, 사면초가 아닌가요?
왜 그렇게 되는지, 그 시작부터 정확히 알아야 예방할 수 있겠지요. 대부분 그 시작은 칭찬 스티커입니다.
평가목표와 학습목표
'천재의 몰락, 둔재의 비상'을 연구한 학자가 있습니다. 캐롤드웩 교수의 연구결과를 요약해보겠습니다.
사람은 두 가지 서로 다른 목표의식, 동기구조를 가지고 있다. 평가목표는 평가를 통해 자신이 얼마나 우수한 사람인지 증명하려는 성향이다. 반면 학습목표는 평가와는 상관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좋아하는 성향을 말한다.
공부를 할 때 평가목표성향의 학생은 평가에 유리한 쉬운 문제를 주로 선택하며 학습목표성향의 학생은 많이 배울 수 있다고 여겨지는 문제를 선택한다.
실패상황에서 평가목표성향의 학생은 자신의 무능력이 입증되었다는 생각에 쉽게 좌절하며 학습목표성향의 학생은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다음에는 잘 하면 된다는 생각에 의욕을 잃지 않는다.
어려운 과제가 주어졌을 때 평가목표성향의 학생은 자신의 무능력이 탄로 날 수 있는, 망신당할 위기라는 생각에 위축되며 회피하기 위해 노력하며 학습목표성향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적극적인 의욕을 갖는다.
지금은 비록 찌질이 소리를 듣고 있지만 아이가 꾸준히 학습목표성향을 발달시키고 있다면 걱정할 게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 아이가 영재라고 하더라도 평가목표성향 쪽으로 기운다면 정말 큰일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앞에 소개한 EBS 다큐에 나와 드웩교수가 한 말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아이들이 배우는 것을 즐거워한다면 칭찬 스티커는 필요하지 않아요."
이 얘기는 칭찬 스티커로 아이들을 유혹하면 할수록 아이들은 학습목표성향이 약해지고 평가목표성향이 강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미국의 교육심리학자 알피 콘이 같은 방송에서 하는 말입니다.
“만약 제가 책을 읽는 것에 대해 상을 받게 된다면 책을 읽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 갈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칭찬이나 상을 받기 위해 책을 읽는 것이거든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쉬운 책을 고를 겁니다. 그래야 빨리 읽고 상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또한, 보다 깊이 없이 책을 읽을 겁니다. 이해가 아니라, 빨리 끝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죠. (그렇게 책을 읽으면 아이들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겠지요. 책 읽기라는 것이 칭찬을 받기 위한 수단, 사실은 하기 싫지만 칭찬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말 겁니다. 결국 읽기 싫은 책이니까 안 읽으면 나중에라도 읽고 싶을 때 읽을 지도 모르겠지만 칭찬의 유혹 때문에 억지로 자꾸 읽게 되면 책 읽기 자체를 싫어하는 아이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뒤의 가로 안의 글은 제 생각을 덧붙인 겁니다.
"아이들마다 30개, 29개, 26개 그리고 23개, ‘참 잘 했어요!’ 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그러나 어떤 아이도 웃지 않았습니다."
같은 방송에 나오는 아나운서의 멘트입니다. 이 아이들은 분명 칭찬 스티커를 받은 만큼 책을 싫어하는 아이가 되었을 겁니다.
제가 부모교육 현장에서 자주 하는 질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육은 아이들에게 평가목표성향을 부추기고 있을까요, 아니면 학습목표성향을 길러주고 있을까요?"
지금까지 학습목표성향이라고 답한 분은 단 한 분도 안 계십니다. 이어서 질문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평가목표성향을 부추기고 있을까요, 아니면 학습목표성향을 길러주고 있을까요?"
묵묵부답. 부모님들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집니다.
부모와 아이 사이
저는 지금 아이의 성적만을 보지 말고 아이의 몸과 마음 그리고 생각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아이의 성적 말고 다른 것을 보는 눈이, 경쟁의식에 사로잡힌 우리나라 부모들에게 모두 퇴화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칭찬 스티커를 쓰지 않고 아이가 책 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때까지 기다린 부모가 방송에서 한 말입니다.
“저기 앉아서 긴장이 되는 거예요. 아니 우리 애들이 좀 너무 못 읽어서...”
그렇습니다. 평소 자기 소신이 뚜렷한 부모들도 현실에서 다른 아이들과 비교되는 순간 마음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부모들을 거의 미치게 만들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온갖 경쟁에 부모들은 정신을 차리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몇 개월에 걷기 시작했느냐, 이렇게 시작된 속도 경쟁은 한글 떼기, 수와 연산에 조기 영어, 최근에는 중국어까지 모든 아이들을 비교 대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일단 그렇게 속도 경쟁을 하는 무대에 아이를 올려놓으면 부모로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아이가 뒤지는 모습을 마음 편하게 바라볼 수 있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일단 아이가 뒤진다고 생각하면 부모로서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하게 되어 있습니다. 칭찬 스티커는 약과겠지요.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아이가 일단 경쟁대열에 합류하게 되면 부모의 당근과 채찍이 시작됩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평가목표성향이 강한 아이들로 타락하게 되겠지요.
자발적인 동기 없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 아이들. 보상이나 위협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아이들.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면서 느끼는 스트레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아이들의 집요한 노력. 그걸 막아야 하는 부모들의 필사의 노력. 이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온갖 보상과 처벌 수단을 총동원하여 아이들을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도록 배후조종하려는 의도, 그런 의도를 낳는 경쟁에 대한 두려움이, 부모의 진심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출발이겠지요. 부모의 배후조종을 잘 따르는 아이들, 경쟁에서 앞서가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면 절대 안 됩니다. 부러워하면 결국 그런 부모들에게 말리는 것이고 결국 그들이 주도하는 경쟁에서 소중한 내 아이가 들러리로 희생되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승리를 돋보이게 하는 희생양이 되고 마는 내 아이. 이제는 그런 아이들, 평가목표성향이 강한 아이들이 겪는 스트레스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랫동안 특권층 아이들은 넉넉한 자원과 기회를 누리며 가족의 보호를 받는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아이들이 우울증, 불안 장애, 심신증, 약물 남용으로 고생할 가능성은 사회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정의 아이들보다 훨씬 크다.(내 아이를 위한 심리코칭)
핵가족이 되면서 부모역할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은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가야 합니다. 아이의 행동을 완벽하게 관리하여 결국 외고에 진학시키고 주변에 부러움을 샀던 엄마에게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엄마 이제 됐어?'
이제 부모역할의 방향을, 존재 자체를 위한 역할로, 경쟁과 비교를 위한 역할이 아니라 아이 스스로 자신의 동기를 개발하여 열심히 노력할 수 있도록 지켜보고 지원하는 역할로 틀어야 할 때입니다.
'빛가람중학교-'19 > 학부모와 함께-박재원소장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읽고 생각하기 (0) | 2019.04.30 |
---|---|
감옥에 갈 아이들과 부모이야기-1 (0) | 2019.04.30 |
감옥에 갈 아이들과 부모이야기-2 (0) | 2019.04.30 |
엄마표의 자랑질 (0) | 2019.04.30 |
청담동 엄마 코스프레 (0) | 2019.04.30 |